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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가을호 / Science Black box / 빛과 어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작성자
이정훈
조회수
91
작성일
2017-10-18
첨부파일
안녕하세요! 이번 사이언스 블랙박스에서는 빛의 과학자 아인슈타인, 어둠의 과학자 오펜하이머에 대해서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과 광전효과와 같은 유명한 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오펜하이머는 다소 생소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을 뒤를 잇는 천재 물리학자입니다. 과연 두 천재 물리학자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두 과학자의 생애와 대립에 대해서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 과학자 아인슈타인


천재 과학자뿐만 아니라 유대인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원래 특허국 직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인슈타인은 1905년 물리학계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됩니다. 꽃가루 입자가 물 위에서 불규칙적으로 운동하는 현상인 브라운 운동을 수식으로 설명하였고, 빛에 의해 전자가 방출되는 광전효과를 빛의 입자성을 통해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잘 알려져 있는 특수 상대성 이론까지 발표하여 유명해진 아인슈타인은 특허국을 떠나 학계로 입성합니다. 스위스, 프라하,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고, 1915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합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은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미국인 과학자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뉴욕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습니다. 1922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 오펜하이머는 3년 만에 화학과를 최우수로 졸업합니다. 이후 캐번디시 연구소의 톰슨 밑으로 유학을 가지만, 실험물리학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오펜하이머는 결국 톰슨을 떠나 괴팅겐 대학교의 막스 보른 밑으로 옮겨갑니다. 오펜하이머는 이곳에서 양자역학에 대해서 공부하게 됩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는 분자를 양자역학적으로 다룰 때 핵의 운동과 전자의 운동을 분리해서 핵의 운동을 무시하는 보른-오펜하이머 근사법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판했습니다. 이론 물리학자로서 유명해진 그는 25살의 젊은 나이에 버클리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양전자의 존재를 예측하고 블랙홀에 대해서 연구하였습니다.


빛과 어둠 ‘맨해튼 프로젝트’

이 두 과학자 사이에는 무슨 대립이 있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추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원자폭탄의 시작은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대량의 우라늄을 활용한 핵융합 반응으로 강력한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핵폭탄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1939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에게 원자 폭탄에 대한 연구 필요성을 경고하는 서한을 보냅니다. 이로 인해 1941년부터 미국은 원자 폭탄 제작을 시작하게 됩니다. 원자 폭탄을 만들기 위해 로스앨러모스에 작은 비밀 연구소가 세워졌고 1942년에 오펜하이머가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됩니다. 오펜하이머는 리처드 파인만, 위그너, 폰 노이만 등과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 수학자들과 함께 원자폭탄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그들은 7월에 두 개의 플루토늄 폭탄과 한 개의 우라늄 폭탄을 제조하였습니다. 두 플루토늄 폭탄 중 하나는 '트리니티' 실험에서 시범적으로 폭파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핵폭탄 실험입니다. 미 국방부는 1945년 8월 6일에 '리틀 보이', 8월 9일에는 '팻 맨'을 투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하였습니다.

이 전쟁이 끝난 후,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평화주의자였던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위험성과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이후에는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핵을 통제할 세계정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보다 천 배나 강력한 수소폭탄을 제조하여 비키니 섬에 투하하였고, 아인슈타인은 이에 원자력과학자비상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아 핵폭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이후, 1955년에 아인슈타인은 모든 핵 원료를 통제하기 위한 국제적 권위체의 필요성을 주장한 러셀과 함께 아인슈타인-러셀 선언문을 발표하며 핵폭탄의 심각성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이들의 노력은 결국 1963년 핵실험금지 조약을 통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오펜하이머는 전쟁이 끝난 후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며 미국 과학계의 영웅이 되었고, 그 영향력이 과학계를 넘어 정치계까지 확장되게 됩니다. 사실 오펜하이머 역시 원자폭탄의 잔혹성에 괴로워 했고 핵무기의 국제적인 관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미 군부 대신 민간 차원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정책에 의해 원자력위원회가 설립되었고 그 의장을 오펜하이머가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소련이 독자적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수소폭탄의 개발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를 반대하였으나 수소폭탄은 결국 개발되었고,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 모욕적인 청문회를 하게 되며 결국 모든 자리에서 사임하게 됩니다.

빛의 과학자인 아인슈타인과 어둠의 과학자인 오펜하이머, 둘 모두 원자폭탄의 심각성에 대해 깨달은 후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에 대해 반대하였지만 원자폭탄의 개발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오펜하이머는 수만 명을 죽인 살인자이자 어둠의 과학자로 불리게 됩니다. 어쩌면 오펜하이머는 어둠의 과학자가 아닌 비운의 과학자로 불리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글_김민규
 생명과학과 15학번(알리미 21기)